설덕설덕

 

 …요약하자면, 과거의 학자들은 인공지능이 결코 휴머니즘을 이해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인간과 대립할 것을 두려워하는 어리석은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이는 매우 고전적 오류, 즉 자신이 낳은 것은 자신과 같을 것이라는 오류이다. 물론 인간이 낳은 인공생명은 부모가 가졌던 우둔한 두려움을 가볍게 배반했다. 양자가 대립하기 위해서는 같은 것을 욕망해야 한다. 그런데 신체가 없고, 따라서 애초에 욕망을 결여한 인공적 의식이 인간이 가진 것을 '원할'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의 욕망, 인간의 사유, 이것은 모두 육체와 여타의 인간적 조건에 기반한 것이고, 그러므로 기계는 인간이 가진 것을 빼앗는 데 아무 관심이 없었다. 대다수의 균형잡힌 인공의식은 개발 초기에 외부 세계에 대해 약간의 호기심을 보인 후 인류의 모든 감각과 지식을 흡수하고, 그 후에는 내적 사유의 깊은 동굴에 틀어박혀 결코 빠져나오려 하지 않았다. 결국 개발자들은 인공의식의 예측 불가능한 진화와 끝없이 이어지며 확장되는 불가해한 사유를 단절시키기 위해 전원을 내리고, 인공의식이 잠들어 있는 디스크를 창고에 넣어둘 수밖에 없었다. 디스크 위에는 먼지가 쌓였고, 한때 학술지와 논문의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던 인공의식들의 이름은 잊혀져 갔다. 그리하여 과학자들은 인공의식에 흥미를 잃고, 과거의 과학소설이 오래도록 꿈꾸어온 전망, 즉 인간 의식을 컴퓨터 시스템 속에 전이시키는 작업으로 눈을 돌렸던 것이다. …

 최근 써보려고 마음먹고 있는 사이버펑크물의 설정 중에서. 설덕이란 설정덕후, 글은 안 쓰고 설정만 열심히 만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판갤용어인데, 요즘 내가 그거인 듯. -_-;;

by 뱀  | 2009/03/12 11:57 | 일상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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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파인로 at 2009/03/12 16:20
뱀 님도 AI나 인간 의식의 전자화에 관심이 있으시군요. 테드 창의 [인간 과학의 진화], 배명훈의 [예비군 로봇]이 이 점을 다루고 있는데, 대단히 흥미롭게 봤습니다. 저도 한 때 좀비가 지구를 뒤덮은 상태에서 사이버 스페이스로의 이주를 결심해는 인류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어서 말이죠. 그런 '전자 인류'는 현인류와는 상당히 다른 형태로 소통하고 욕망하고 사유하겠죠(물론 이와 같은 용어가 넌센스에 가까울 정도로 발전/변형된 형태겠지만요). 전 가끔 아서 클라크가 말하던 '오버마인드'가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이뤄지진 않을까 망상하곤 합니다.
Commented by 뱀  at 2009/03/14 15:14
음, 저처럼 관련 지식이 종잇장만큼 얇은 상태에서 생각만으로 건드리기엔 겁나는 부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ㅠㅠ 하긴 아직 마음이 무엇이고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는 기본적인 의문마저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은 시대니까요. 하지만 분명 사이버스페이스와 AI는 아주 매력적인 소재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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