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01일
나기니 공주
"예? 나가가 뭔지 잘 모르신다고요?
아, 죄송합니다. 다른 하늘에 오래 계시다 보니 그러실 만하지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나가란 말입니다, 인간과 함께 사는 여러 종족들 중의 하나입니다. 상체는 인간과 비슷하지만 하체는 거대한 뱀의 모습이지요. 그 수명은 인간의 몇 배에 이르며, 그 힘은 신들과도 대적할 정도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들의 나라는 물 아래 있으니,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것이 바로 나가들의 왕, 나가라쟈이고요. 나가 여성은 나기니라고 부르지요.
자, 아시다시피 제 윗분들, 불보살님들과 천신님들의 계획이 조금 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몸은 그저 가엾고 하찮은 전령일 뿐입니다만, 그 분들의 대자대비하신 마음을 짐작조차 못할 정도의 어리석은 무지렁이는 아니올시다. 이토록 오래 준비되고 갖은 노력을 요했던 계획이, 아니 그만 가장 중요한 인물의 변덕으로 이리 될 줄이야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아, 알았습니다, 알았다고요. 간단하게 설명을 하지요. 성질도 급하시긴.
그러니까 문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가장 우매하고 저급한 세계인 저 추악한 욕계欲界의 하층에 일정 주기마다 한 번씩 다른 세계의 사자가 파견되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다 그놈들을 구원해 보려는 고귀한 분들의 자비심입지요. 이번 유가Yuga엔 참으로 오랜만에 인류에게 사자를 보내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인간이란 놈들은 어리석기 짝이 없기 때문에, 솔직하게 얘기하면 도무지 알아먹질 못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인간으로 환생을 해서 철학과 지식체계와 신앙 따위를 새로 짜 올리는 수고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눈앞에 있는 것조차 제대로 보지를 못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니까요.
사캬 족의 싯다르타 왕자가 바로 이번의 그 사자였습니다. 후에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무상정등정각을 얻어 인류의 지도자 행세를 할 예정인, 바로 그 사자였단 말씀입니다. 멋진 호칭도 많이 준비돼 있었죠. 부처, 세존, 여래, 정각자, 석가모니 등등.
그런데 이 싯다르타 왕자는 아주 젊어서부터 용모단정, 성적우수, 스포츠 만능, 아 그야말로 미남에 호남이니 여자가 꼬이지 않을 리 없었습니다. 하지만 왕자는 이웃 나라 최고의 미녀인 야쇼다라 왕녀가 육탄 돌격으로 달겨들어도 그저 심드렁할 따름이었지요.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수많은 전생에서 여자는 물릴 만큼 따먹었…… 죄송합니다. 소생이 말이 거칠어서요. 전령이란 여러 하늘을 돌아다니는 것이 일이니 아랫것들과도 가까이하게 된답니다. 좀 이해해 주십시오. 헤헤…….
어쨌든 여색에 현혹당하지 않았단 겁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출가를 해야 하니 세속의 정에 얽매여서는 안 되지요. 안 되는데…… 이놈의 왕자가 일을 저질러버린 겁니다. 정말이지 그런 자가 아니었건만, 우둔한 인간의 몸이란 가장 총기 어린 영혼마저도 마비시켜 버리는가 봅니다.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와중에 실의에 빠져 있던 왕자는…… 네? 사문유관이 뭐냐고요? 거 꽤 유명한 에피소드인데. 간단히 요약하면 카필라 성의 네 문을 통해 유람을 다니며 생로병사의 고통을 목격하고 출가를 결심하게 되는 것이죠. 아니, 결심할 예정이었습니다. 네.
그런데 유람 중에 어떤 멍청한 부하놈 하나가 싯다르타 왕자를 호숫가로 데려갔습니다. 왕자는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인간의 근본적인 괴로움에 대해 깊이 숙고하며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눈에 뭔가 낯선 것이 눈에 띄었지요. 바로 나가들의 공주였습니다. 아까 나가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 기억하시죠?
아, 인간식으로 말하면 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지요! 아름다운 나기니 공주는 그날 열일곱 살이 되어 처음으로 수면 위에 머리를 내밀어본 참이었습니다. 당연히 인간을 보는 건 난생 처음이란 얘기지요. 마침 싯다르타 왕자도 실제 나가를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나기니 공주는 멋모르고 잘생긴 왕자를 향해 생그레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저항할 수 없이, 폭풍처럼 격렬한 애욕의 불길이 왕자의 마음을 덮쳐버렸던 겁니다. 말하자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랑에 폴 인 러브! 아, 모르는 표현이면 그냥 넘어가 주십시오. 어쨌든 그랬다는 겁니다. 맙소사.
왕자는 그 날부터 생로병사 따위는 잊어버리고 끙끙 앓기 시작했습니다. 짝사랑이었지요. 어쩌겠습니까? 인간과 나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생식이 불가능하다, 그 말씀입니다. 싯다르타 왕자는 자신을 나가로 만들지 않은, 혹은 나가 공주를 인간으로 만들지 않은 운명을 저주하며 점점 시들어 갔습니다. 덩달아 저 불보살님들과 천신님들도 끙끙 앓게 되었지요. 아 얼른 수행해서 깨달아야 할 자가 저러고 자빠져 있으니 난감한 노릇 아닙니까.
그런데 그 다음으로 일어난 사태는 더욱 난감합니다. 들어보십시오.
변재천辯才天이라고 혹시 알고 계십니까? 맞습니다, 변재천 사라스와티Sarasvati. 인간들이 칭송하는 지혜와 음악의 여신이며 물의 신이기도 하지요. 물은 나가들의 근원이니 당연히 그녀는 나가 종족과도 가깝습니다. 싯다르타 왕자는 사랑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향을 피우고 제물을 올리며 변재천에게 기도를 했습니다.
'아아! 여신이시여, 들어주시오. 이 마음의 고통이 내 몸까지 갈갈이 찢는 것 같소. 여신의 가장 달콤한 비파 소리라 해도 이 아픔을 덜어놓기 어려울 것이오. 어찌하여 나는 그 모든 귀한 가문의 아름다운 딸들을 마다하고, 다른 종족의 여인을 사랑하게 되고 만 것인지! 또한 나는 그녀의 이름도, 신분도, 나이도,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단 한번 얼굴을 다시 볼 방법조차 알지 못하니 다만 홀로 슬퍼하고 울부짖을 뿐이오. 그 얼굴을 다시 보고 그녀가 다시 한번 내게 미소짓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걸 다 줄 수도 있겠소.'
진부하지만 진심어린 고백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하자 변재천도 마음이 움직이고 말았지요.
그리하여 여신은 그 고요한 저녁, 노을 속에서 현현했습니다. 제단 앞에 무릎꿇고 있던 싯다르타 왕자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기도를 올리고 있긴 했지만 여신이 눈앞에 나타날 줄이야 알았겠습니까. 눈처럼 하얀 뱀이 꿈틀대는 보관을 쓰고, 신적인 미소를 띤 변재천 사라스와티는 싯다르타에게 말했습니다.
'고귀한 자가 되셔야 할 분이여, 당신이 사랑하는 여인은 나가들의 공주입니다. 당신은 그녀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답니다.'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나는 그녀와 맺어져야만 되겠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더 살아갈 수가 없겠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할 것이고, 바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 바치겠소. 제발. 맺어질 수 없다면 다시 만나게라도 해줄 수 없겠소?'
'……정 그러시다면.'
도대체! 변재천이라는 여신은 왜 그렇게 분별이 없답니까? 거기서 '정 그러시다면' 하는 게 말이나 됩니까? 절대로 안 된다고 그랬어야지! 그 모양으로 마음이 약해가지고 신이라고 자처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제가 볼 때는 변재천도 아마 싯다르타 왕자의 용모에 내심 흔들렸던 게 아닌가 합니다만, 뭐 하찮은 전령으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일입지요. 여하튼 변재천은 이런 제안을 합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참으로 아름답군요. 나는 음악과 변설辯舌의 신. 만일 당신의 목소리를 내게 바친다면, 나는 당신을 나가로 만들어주겠어요.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일인 것 같군요.'
싯다르타는 전혀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가져가시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지요. 변재천은 기쁨에 차서 자신의 자루에 왕자의 목소리를 집어넣었고, 대신 그를 나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하, 이 무슨 가당찮은 일인지요. 싯다르타의 목소리를 달라고 하다니. 그의 목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인간 세상에 길이 남을 설법을 하기 위해서였단 말입니다. 변재천 같은 바보 여신이 두고두고 들으면서 침 흘리라고 그렇게 아름다운 게 아니에요. 그녀는 나중에 벌을 좀 받아야 할 겝니다.
어쨌든, 그 장면을 지켜본 한 천녀의 말로는 정말이지 신비하기 짝이 없었다 하더군요. 왕자의 티 하나 없던 목덜미에 아가미가 생겨났고, 갖은 사치스러운 음식을 맛보던 혀는 두 갈래로 갈라졌으며, 그의 미끈한 두 다리는 서로 합쳐졌습니다. 훌륭했던 성기는 두 개의 교미기로 변모했고요. 허리께에서부터 보석 같은 비늘들이 돋아나기 시작했지요. 믿을 수 있으십니까? 나가의 비늘은 본래 흉측하고 불쾌합니다. 그런데 그의 몸에 돋아난 비늘들은 마치 갖은 칠보를 박은 것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마침내 그의 하체는 완전한 뱀이 되었고, 그는 그 자리에다 편지 한 장을 남긴 채 몰래 왕궁을 빠져나갔습니다. 나가들의 나라로 통하는 호수를 향해 떠난 것이었죠.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도리천忉利天은 난리가 나고 긴급 소집회의가 열렸는데, 엄청 많은 분들이 참석을…… 네? 아, 그런 건 별로 관심 없으신가 보군요. 하하, 그런 면이 분명 있을 겁니다. 그 양반들도 본래 욕망이란 게 거의 없다시피 하니 어리석은 인간계의 일이 얼마나 재미있고 귀여워 보일지 능히 짐작할 만합니다. 그렇잖아도 심심하던 차에 무거운 엉덩이들을 떼실 만도 한 것이죠.
아,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느냐고요?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입니다.
싯다르타는 호수 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갔습니다. 물결 속으로 꿈처럼 비쳐드는 빛의 커튼이 점점 엷어지고, 차가운 수온과 두려운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지만 그는 용기 있게 계속해서 나아갔지요. 그리고 얼마 후, 물 아래에 또 다른 세상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아가미 호흡 대신 다시 폐로 숨을 쉬며 그 어둡고 축축한 땅을 한참 동안 꿈틀꿈틀 나아갑니다. 그야 하체가 뱀이니 걸어갈 수는 없지요. 네? 아, 정말로 뱀처럼 기어서 간 건 아닙니다. 나가들은 몸을 세운 채로 움직이지요. 섰을 때의 키는 인간과 거의 비슷하거나 조금 큰 정도고요. 하하.
왕자는 나가가 된 탓인지 배고픔도 목마름도 별로 느끼지 않았습니다. 단지 나기니 공주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멀리 보이는 거대한 용궁을 향해 쉼없이 다가갈 뿐이었지요.
마침내 용궁에 도착했을 때 그는 지쳐 쓰러졌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기니 공주가 눈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용궁 안에 있는 한 방에 눕혀져 있었습니다. 싯다르타는 벌떡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녀의 이름이라도 부르고, 사랑을 고백하고 싶었건만 목소리는 이미 변재천이 가져가 버린 뒤지요.
자기 목을 부여잡으며 안타까워 눈물을 보이는 그를 보고, 공주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갈라진 혀를 날름거렸습니다.
'나가가 된 건가요?'
그녀의 말에 싯다르타는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인간과 말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지만 알아들을 만은 했던 모양입니다.
'어떻게 나가가 되었죠?'
왕자는 공주를 가리켰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지요.
'나 때문에?'
끄덕끄덕.
싯다르타의 얼굴을 보고, 나기니 공주의 얼굴에는 동정심과 기쁨과 애정이 뒤섞인 아름다운 표정이 떠올랐습니다.
'가엾어라…… 나도 그 날 이후 늘 당신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포기했었죠. 이렇게 나가가 되어서까지 찾아와줄 줄 몰랐어요. 게다가 이토록 아름다운 비늘이라니…….'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싯다르타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아버님께 말씀드려 당신과 혼인식을 올리겠어요. 이제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아요, 내 사랑. 신들도 우리의 혼인을 막지는 못할 거예요.'
싯다르타 왕자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번에는 기쁨과 감동의 눈물이었지요.
거기까지도 좋았다 이겁니다. 네, 뭐, 보살님들과 천신님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인류는 암담한 미래에 직면했지만, 뭐 어쨌든 괜찮다 이거예요. 싯다르타 왕자에겐 해피엔딩이니까요.
그런데 혹시, 뱀들이 교미하고 나서 배고픈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다는 이야기 들어보셨습니까?
정말로, 농담이 아닙니다. 혼인식을 올리고 난 그 첫날 밤에, 부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뒤에 말이지요.
나기니 공주는 싯다르타를 머리통부터 씹어먹어 버렸습니다.
인류의 희망, 구세주,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인간이 될 예정이었던 그를, 단물만 쪽 빼먹고 먹어치워 버린 겁니다!
제기랄, 더러운 짐승 같으니! 아,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대체 뱀이란 족속들은 뭐가 문제인 겁니까? 옛날에도 선악과인가 뭔가 때문에 문제를 일으켰었지요. 저 많은 높으신 분들의 상심과 실망을 생각해 보세요. 기껏 인간으로 태어나게 만들어서 수많은 시련과 장애, 그 후의 깨달음을 모두 계획해 놨건만, 고작 짝짓기가 끝나고 잡아먹히는 수컷 신세라뇨! 아이구 나 참, 해피엔딩은 개뿔이 해피엔딩입니까.
잡아먹히면서 싯다르타가 무슨 생각을 했을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두려워하거나 절망했을까요? 사랑하는 여인의 품에 안겨 맞는 죽음이니 어쩌면 얼마쯤은 황홀한 죽음이었는지도 모르죠.
어쨌거나 그 이후, 나기니 공주는 싯다르타의 알을 뱄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상황을 보려고 한번 직접 찾아갔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그 공주가 예쁘기는 하더군요.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는, 글쎄요. 소생으로서는 역시 알 수 없는 일입지요.
……긴 얘기를 했더니 어째 피곤하군요. 휴우.
네? 아, 여기까지 찾아온 목적 말씀입니까. 그야…… 대범천大梵天 브라흐만Brahman님께서는 사바세계를 주재하시는 분이지 않습니까. 지금 색계의 네 하늘까지도 이 일 때문에 난리법석이니, 아무리 한동안 손 떼고 계셨다지만 이번 사태에야말로 대범천님이 힘 좀 쓰셔야……
예에? 아니,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인간 대신 나가라쟈 부처님이 나올 거라고요? 아니 무슨 대체역사물 쓰실 일 있으십니까? 예? 평행우주? 패럴렐 월드? 나가가 지구를 지배해요? 이 양반이 지금 무슨 소리를, 으악! 그렇다고, 악! 때리시면 안 되지 말입니다! 아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
2009. 10. 1.
# by | 2009/10/01 00:46 | 악몽의 기록 | 트랙백 | 덧글(4)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갑자기 마리온이라는 이름을 보니까 옛날 생각이 막 나네요 ... ㅋ 벌서 10년이 다되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