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중에 읽은 책 리뷰

1. 뇌의 배신

우리 뇌에는 다른 일을 할 때는 작동하지 않다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미친 듯이 포도당을 먹어치우기 시작하는 영역이 있다. 인간의 뇌는 일할 때나 TV를 볼 때보다 그냥 가만히 있을 때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하고 있다. 이 영역을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라고 부른다. 그럼 이 영역은 대체 무슨 역할을 할까? 이것이 이 책의 주제다. 굉장히 흥미 깊게 읽었다. 뇌과학으로 볼 때 명상이나 기도 수행은 특별한 수준의 자기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를 의도적으로 장기간 가동시키는 행위로 재정의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책을 집필하는 목표는 게으름 피우기를 정당화하는 확고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한가한 활동과 창의력 사이의 관계를 신경과학적으로 통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참을 수 없는 시간관리 산업을 관 속에 넣고 못을 박고 싶다." 원제는 The Art & Science of Doing Nothing.

2. 나, 소시오패스

역시 흥미롭고 유익했던 책. 익명의 30세 백인 여성 소시오패스인 저자가 자신의 삶과 내면을 고백하면서 소시오패스에 대한 이해를 제공한다. 완벽하게 합리적인 동시에 철저하게 부도덕한 고기능 소시오패스의 캐릭터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데가 있다. 문장마다 반짝이는 지성과 재능, 열정은 공감능력과 지능이 분명코 별개임을 알려준다. 감정이 무딘 저자가 섬세한 소셜 다이내믹스에는 얼마나 민감한지 소름이 돋을 정도다.

저자는 소시오패스는 범주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문제라며 자신과 같은 이질적인 존재도 사회에 성공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가치중립적 관점을 내면화한 나로서는 여러 모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소시오패스가 단순한 잠재적 범죄자가 아니라 일반인과 다른 관점과 가치관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오만, 냉정, 교활, 지나친 합리성과 매력적인 성격으로 특징지어지는 소시오패스의 증상은 각도를 달리하면 기업가적 역량이자 리더의 자질일 수 있다. 얼마 전 뉴스피드에서 "왜 권력층에 올라간 사람은 공감 능력이 약화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글을 보았는데 앞뒤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권력을 쥐었기 때문에 공감 능력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공감 능력이 적었기 때문에 도리어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책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서 25명 중 1명은 소시오패스다. 이 책을 통해서 자신이 소시오패스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지 자가진단을 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 천성과 양육, 레즈비언 로맨스 등 여러 영역을 건드려 가면서 마치 소설처럼 재미있게 읽히는데, 자기애가 지나쳐 말이 좀 장황한 게 단점이다.

3. 경성 고민상담소

1930년대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독자문답란에 실린 질의 문답들을 사회문화사적으로 해설한 책이다. 벼라별 사연이 다 등장하는데 마녀사냥은 댈 바가 못 된다. 압권이었던 것은 언니의 남편, 즉 형부와 불륜을 맺었다가 임신이 된 동생 이야기였다. 형부에게 낙태시키자고 했더니 더 큰 죄를 짓는 것이라면서 "그만 자살하라"고 했다. 그러다가 눈치를 챈 언니가 절대로 낙태나 자살은 해서 못 쓴다면서 기왕 이렇게 된 바에 두 사람이서 한 남편을 섬기고 살자고 했단다. 저자는 책의 취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근대 한국인들은 물질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지금보다 훨씬 형편없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 이 책의 궁극적인 의도는 근대 한국의 가정 윤리와 성 윤리의 비루함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보다 훨씬 윤리적이었을 것이라는 한국인들의 근거 없는 믿음을 해체하는 것이다."

내용 자체도 재밌지만 이상, 이광수 등 한국 근대문학의 영웅들이 숨쉬던 이 시기에 평범한 사람들이나 기자들이 어떤 식으로 글을 썼는지 훔쳐볼 수 있다. 한문체와 일본어투가 섞인 고풍스러운 만연체에 근대 특유의 치졸한 세계관이 간장처럼 스며들어 더할 나위 없이 읽는 맛이 있다.

4. 모두 주자! 그냥 주자! 조건 없이 기본소득

실업은 세계적인 문제다. 생산성은 높아졌지만 사람은 점점 필요없어진다. 일을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일자리를 만드는 방식(이를테면 4대강 사업)도 한계가 있다. 여기에 프랑스 좌파 경제학자인 저자는 완전 고용이라는 환상을 포기하고 모든 사람에게 평생 월급을 주자는 주장을 내놓는다. 나는 기본소득 개념을 이 책으로 처음 접해서 좀 황당했는데 실은 예전부터 많이 논의되었던 개념이라고 한다.

반론은 금방 떠오른다. 재원 마련이라든가 근로의욕 저하, 이민자 폭증 등등. 저자는 여기에 대해서 아주 그럴싸한 반박들을 내놓는다. 하지만 노동과 자본주의에 대한 관점이 우파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아마도 반대파 설득은 어려울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 기본소득 도입은 아주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대안으로서 모색해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한국에서 거의 논의가 없었던 개념이니만큼 언론에서 의제설정을 해볼 만할 것 같다.

by 뱀  | 2014/08/24 07:46 | 사적인 독서노트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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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신중한 기린 at 2014/08/24 11:00
3번 4번 책들이 매우 흥미롭네요. 덕분에 좋은 책들 알아갑니다:)
Commented by 뱀  at 2014/08/25 00:14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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