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 9집 감상

서태지 9집의 테마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내면의 괴물과의 화해'인 것 같다.

5번 트랙 '프리즌 브레이크'를 잘 들어보면 "갖췄다"를 "갇혔다"로 이해하는 괴물의 목소리가 있다. 그런 이유로 "세상이 만든 보물지도"를 전해주는 "저 TV를 박살내"야 하는 것이다. 집요한 스포트라이트에 시달리던 서태지는 8집 '모아이'에서 비로소 "이제 어둠을 허락받았다"고 노래했고, 어두운 바닷속에 머리끝까지 잠겨 이 괴물과 한참을 다툰 끝에 마침내 화해를 이룬 모양이다. 동굴에 들어가 시련을 극복하고 용을 굴복시켜 선약(elixir)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귀환하는 영웅서사의 구조와 같다. 돌아온 서태지가 그토록이나 편안하면서도 동시에 겸손과 품위를 갖춘 듯해보이는 것은 오랜 내면의 싸움 끝에 얻어낸 심적 성취 덕분일 것이다. 사실 서태지는 아이들 시절 3집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도 괴물 같은 이면의 사악한 자아를 아주 다크하게 다룬 바가 있는데, 그때는 혼란스럽고 무서울 따름이었다면 이제는 괴물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릇이 커진 것이다. 덧붙여 같은 3집의 '내 맘이야'는 이 괴물의 천진한 목소리를 날것 그대로 담았다고 생각한다.

'잃어버린'은 무려 중년의 위기라는 주제를 다루고 계신데 칼 융의 말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융은 35세를 넘어 자신에게 찾아오는 환자는 모두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노라고 말했었다. 이 앨범 최고의 마스터피스라고 여기는 7번 트랙 '비록' 역시 다른 누가 아닌 자신의 다른 마음에게 보내는 노래라는 게 내 생각이다. 겨울왕국에 빗대어 말하면 서태지가 안나고 괴물이 엘사이며, '비록'은 서태지가 마법의 힘을 가진 그림자 괴물에게 같이 눈사람을 만들자고 문을 두드리는 노래다. 가장 애틋한 자기고백이랄 수 있는 '비록'을 8번 끄트머리에 감춰둔 것이 서태지 특유의 샤이함을 보여준다고 해야 하나. 드디어 마음의 수면이 잔잔해진 뒤에 부르는 마지막 트랙 '성탄절의 기적'은 감동 그 자체다. "세상에서 가장 파란 작은 새를 만나기 위해 난 맑은 물을 채우리"... 나는 무슨 중견 시인이 써낸 문장인 줄 알았다.

다른 노래가 전부 서태지 자신에 대한 이야기인 탓에 타이틀인 크리스말로윈이 혼자만 정치 얘기하면서 튀어보이는 모양새다. 애꿎은 마녀를 포획한 새빨간... 이건 볼 것도 없이 정치 얘기고 청소년기부터 일관된 반골이었던 자신의 정서를 지극히 정밀하게 표출한 노래라고 봐야겠다. 뮤직비디오에서 진짜로 마녀와 와인이 등장하는 걸 보고 은유의 격을 깎아먹은 것 같아 한숨이 나왔다. 마녀가 무엇이냐는 해석이 갈릴 수 있겠는데 최근에 마녀사냥을 당하는 사람 또는 단체가 한둘이 아니라서 뭐라고 딱 잘라 말 못하겠다.

by 뱀  | 2014/10/23 10:44 | 생각과 이미지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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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오즈 at 2014/10/31 08:17
훌륭한 리뷰네요. 많은 생각을 하게합니다.
괴물을 길들였군요, 마침내.
아직 시디가 도착하지 않아 음악만 듣고 있었는데 가사를 전부 알게 되면 저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어요.
Commented by 슈크림 at 2015/08/27 23:31
뭐, 이를테면 그런 거겠죠. 바깥 세상에 보여지는 '서태지'라는 모습과 그 자신 안에 있는 '정현철'이라는 자아, 어느새 한 개인으로서는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커져버린 '서태지'라는 이름과 반대급부처럼 내면에서 자꾸만 자기주장을 하는 '정현철'로서의 자신...어느쪽이 진짜 자신인지 혼란스러웠으나 결국은 둘 다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해가는 과정이랄까...영화 '배트맨 포에버'에서 배트맨과 부르스 웨인이 어둠과 빛으로 상징되었지만 그 둘은 결국 하나라고 결론을 냈듯이,(전 겨울왕국을 안 봐서오래 전 영화를 끄집어 낸^^;;) 서태지 씨 자신도 그렇게 모두 다 껴안고 가기로 결심하셨다는 생각이 드네요. 멋진 해석 잘 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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